
국가를 잃은 시대, 이름은 좌표였고 다짐이었다. 배우 김지석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작명법 “북경, 장충, 온양”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독립을 향해 떠돌던 한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이자 가족을 지키려던 간절한 기록이다.
독립운동가 김성일의 발자취가 된 이름들

김지석의 조부 김성일 선생은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의용단에 몸을 담았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으로 전해진다.

거친 유랑 속에서 태어난 아들들에게 선생은 태어난 땅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큰아버지 김북경, 작은아버지 김장충, 그리고 아버지 김온양)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명 원칙을 이어받았고, 훗날 영국에서 태어난 사촌에게는 ‘김런던’이라는 이름이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북경 쪽에서 내려오셨다. 태어난 지명 이름으로 지은 거다… 사촌형은 런던에서 태어나서 김런던.”

북경, 장충, 온양이라는 지명은 가족이 머문 좌표이자 다시 일어설 다음 걸음을 가리키는 표식이었다.
아이의 이름 속에 새겨 넣은 지명은, 독립의 뜻을 후세가 매일 부르고 기억하게 하려는 ‘살아 있는 기념비’였다.
유머 뒤에 숨은 역사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지석은 “형 이름이 한때 ‘김신사’였고, 자신은 부활절에 태어나 ‘김부활’이 될 뻔했다”는 농담으로 웃음을 줬지만, 그 기저에는 ‘지명으로 이름을 짓는’ 집안의 뿌리가 독립운동의 맥락에 닿아 있음을 늘 함께 전한다. 대중이 미소 지을 때마다, 이름의 출발점인 역사도 함께 소환되는 셈이다.
김성일 선생은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가 독립의용단에 참여했고,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와 고문을 겪은 뒤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강인함은 지명의 이름으로 아들들의 삶에 전해졌고, 손자 세대의 배우 김지석이 대중 앞에서 그 사연을 증언하며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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